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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레퍼런스, 세진컴퓨터의 흥망성쇠

김맥킨 2016. 10. 12. 12:19

대한민국 PC보급의 한 획을 그은 세진컴퓨터


필자가 중학생때였나, 한창 486이니 586이니 떠들어 제낄때였던 거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컴퓨터를 사주신다며 데려갔던 곳이 바로 세진컴퓨터였다. 당시 우리집은 가난한 축에 속했었다. 아버지는 영업용 택시를 하셨고 어머니는 만두 공장에서 만두를 빚는 일을 하셨으니, 수입이 그리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우리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해 첫날 두툼한 외투를 입고 "컴퓨터 좀 보러 가자, 공부 열심히 하라고 사주는 것"이라며 길을 나섰을 정도로 세진컴퓨터는 저렴한 가격으로 PC를 공급했었다.


이 세진컴퓨터는 1992년 설립하여 2000년에 파산한 컴퓨터 유통 전문 업체로 약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 PC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파급력이 컸는고 하면 세진컴퓨터 때문에 동네 컴퓨터 매장들이 마진을 포기한 채 울며 겨자먹기 식의 가격 할인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대기업 제품에까지 영향을 미쳐 전체적인 PC 가격 할인이라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었다. (기억하기로는 세진컴퓨터는 거의 1년 내내 바겐 세일을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세진컴퓨터, 대우통신 대리점에서 시작


이 세진컴퓨터는 한상수 사장이 부산에 대우통신 대리점으로 창업을 한게 최초였다고 한다. 초반에는 부산에서 작게 시작했던 대리점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진출, 전국적인 컴퓨터 전문 매장으로 성장했으며 이 기세를 몰아 무서운 속도로 전국 단위 매장을 늘리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의 확장을 선택한 업체가 의류업계에는 스베누가 있고 식음료계에는 카페베네가 있는데, 이 중 세진과 스베누가 끝이 안좋았으니 카페베네도 곧...음...아...어쨌든...

세진컴퓨터의 이런 무모하고 공격적인 확장과 동시에 이와 비견되는 공격적인 마케팅도 양적 성장에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직원들이 매일 퇴근 후 10톤 탑차에 전단지를 가득 싣고 매장 주변의 아파트나 전봇대, 인근 상업지구 등에 삐라 뿌리듯 살포했다고 하는데...이런 전략이 서울에서는 많은 광고피로도에 묻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지방에서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면서 압도적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필자의 어린시절을 잠시 회상해보면 컴퓨터가게라는 것이 그냥 동네 조그만 컴퓨터 매장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컴퓨터 매장에서 복사게임CD를 구워주거나 하는 형태로 가게를 운영했고 고객들은 그런 컴퓨터 매장에 가서 눈탱이를 쳐 맞고 사던가 아니면  아니면 용산전자상가 (지금 선인상가 인근)에 가서 사야만 했었다. 

하지만 세진컴퓨터는 지금의 하이마트 매장이나 베스트샵 매장처럼 큰 건물, 보통 2~3층 높이의 건물에 매장을 만들었고 그 큰 매장에서 오직 컴퓨터, 주변기기, 소프트웨어만 판매를 했었다.


게다가 이런 규모의 매장이 전국단위로 넓게 펼쳐져 있다보니 고객들에게 다양한 쇼핑 경험을 제공했는데, 한상수 사장이 대우통신 대리점을 하면서 느낀점과 노하우로 인해 고객들의 만족감을 더욱 높였다고 보여지고 있다. 

우선 세진컴퓨터는 기존 용산이나 동네 컴퓨터가게와 달리 방문하는 고객, 그리고 구매한 고객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세진컴퓨터는 모든 직원들에 대한 철저한 CS교육으로 고객들이 방문했을 때 상당히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단정한 복장을 입고 친절하면서도 정중한 인사를 건네며 접객을 하는 직원들 덕에 매장을 찾는 방문자는 갈수록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세진컴퓨터는 마치 백화점처럼 전혀 호객행위를 하거나 별도의 영업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깔끔한 매장, 누구나 쉽게 만져보고 체험해보지만 직원은 절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이런 서비스는 지금에야 대형마트, 백화점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서비스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서비스를 특히 지방에서 느끼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서 무려 15년 이상 흐른 지금 용산을 가봐도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도, 15~16년 전에도 용팔이들은 호객행위를 하고, 욕설을 내뱉고, 협박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것들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지 않는가? 그 당시보다 지금이 많이 나아졌다 하더라도 용산에서 기분 좋게, 여유롭게 쇼핑하기란....기대를 말아야지...


어쨌거나 세진컴퓨터는 지금 전자제품 매장들이 시행하는 서비스를 그 당시에 이미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구현해 놓았었다. 고객들이 방문해 대접을 받으면서 여유롭게 제품들을 둘러보고 만져보고 게임도 해보면서 다양한 제품들을 비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제품이 정찰제였기 때문에 바가지 쓸 일 없이 마음에 드는 제품을 제 값에 주고 사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발품을 팔기 어려운 지방 고객들은 정말 신세계를 경험했을 것이다. 


사실 서울 사는 사람들이야 한 번 짬을 내어 용산에 방문해 욕설도 좀 듣고 실랑이도 벌이고 가격 흥정도 하면서 저렴하게 PC를 구매할 수 있었지만 지방 고객들은 용산에 방문하는 일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보통 용산에 전화를 걸어 '이런 이런 제품을 구입하고 싶다'라고 상담을 받고 해당 제품이 있을 시 무통장 입금을 통해 구매해야 했다. 요즘에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견적비교하고 바로 결제가 가능하지만 그 당시는 그런 서비스가 그리 익숙지 않을 시점이었고 게다가 택배도 지금처럼 빨리 빨리 오고 가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몇날 몇일을 기다려야만 PC를 받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세진컴퓨터 매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소비자들은 용산에 굳이 가지 않고도 세진컴퓨터 매장에 들러 원하는 제품을 만져보고 비교해보고 구매할 수 있었으므로 당시 PC 시장에 얼마나 큰 센세이션을 불러왔는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세진컴퓨터는 이후 무료 컴퓨터 교실을 운영, PC를 구매하지 않은 잠재고객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전개, PC보급에 앞장서기도 했고 모든 컴퓨터에 정품 윈도우를 설치하였으며 모든 고객에 대한 평생 무상 A/S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 컴퓨터 출장 수리 또는 대기업의 출장서비스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세진컴퓨터는 A/S 기사에 대한 CS 교육도 철저했는는데 서비스 기사들도 단정한 복장을 준주하고 지역이 아주 멀더라도 직접 찾아가 A/S를 해줄 정도였다고...심지어 도서산간 지방이라면 배를 타고, 등산을 해서라도 찾아사 AS를 해줬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간 세진컴퓨터의 마케팅 전략


최근 컴퓨터 유통업체를 보면 컴퓨존, 아이코다 등의 업체들이 다양한 서비스와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저마다의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는데 사실 이거 다 세진컴퓨터가 하던 것들이다. 그리고 세진컴퓨터가 하는 만큼 하지도 못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직원 CS교육, 넓은 매장, PC를 체험할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하고 한 층에는 PC게임으로 도배를 해놓는다던가 이런 것들은 사실 지금 대형마트나 하이마트 등의 준대형 매장들이 하고 있는 서비스들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런 서비스를 앞세워 소비자를 공략한다는 마케팅 전략은 정말 시대를 앞서간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세진컴퓨터의 마케팅 전략은 이후 TV광고에서 돋보였는데, 세진컴퓨터의 주력 모델인 진돗개 시리즈를 광고하면서 진도에서 팔려간 진돗개가 옛 주인을 찾아 머나먼 길을 건너 돌아왔다는 CF는 단지 CF로 그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부가 컨텐츠를 만들어내며 큰 이슈를 낳기도 했다. (하얀마음 백구가 이 CF의 인기 때문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라능~데헷~) 한 번 주인이면 영원한 주인이라는 메인 카피와 함께 주인을 찾아가는 진돗개의 이미지와 평생 무상 A/S 정책을 대비시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 


세진컴퓨터의 광고 캠페인 중 세종대왕 시리즈의 광고에는 "세종대왕은 문맹 없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세진은 컴맹 없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카피가 나오는데, 이 역시 엄청난 센세이션이였다. 주민센터(당시 동사무소)와 다양한 복지시설에서는 너도 나도 컴퓨터 강좌를 만들었고 세진 컴퓨터 역시 무료 컴퓨터 강좌를 열면서 잠재고객을 흡수, PC 보급에 선봉장으로 나서기도 했었다.


이후에는 당시 신인에서 일약 스타로 거듭난 강호동을 메인 모델로 쓸 정도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했다.


짧은 성공, 그리고 파산


이렇게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세진컴퓨터이지만 창립 3주년이 채 되지 않은 1995년, 결국 부도위기를 겪게 된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스베누와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데, 세진컴퓨터의 파산에는 바로 무리한 확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베누와 세진컴퓨터의 비교는 추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다뤄볼 생각이다.


여튼 이 정도의 규모로, 또 이 정도로 단시간에 사업을 확장하려면 사실 막대한 자금력과 스폰서 등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진이 결정한 것이 바로 "차입경영"이다. 


이 차입경영은 쉽게 말해 돈을 빌려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사의 경영이 과도한 부채를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차입경영은 초기 막대한 자본력 없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차입 자금의 비중이 클 수록 매출 부진 또는 외부 요인으로 자금 사정이 나빠졌을 때의 리스크가 커지므로 차입 경영을 할 때는 돈 관리를 정말 철저하게 해야지만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이런 차입경영 실패로 리스크를 겪는 사례가 있는데 웅진, STX, 동양 등 다양한 기업들이 차입 경영 이후 수익성 악화로 인한 원리금 상환 문제로....뭐 어쨌든 차입 경영에 대해서도 역시 나중에 다시 한 번 포스팅을 하도록 하고 다시 세진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다.


여튼 세진은 이렇게 차입을 통해 물건을 들여오고, 그 물건을 저렴하게 팔고, 그 매출액을 기반으로 다시 차입을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경영을 지속해왔다. 그렇다보니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즉각 부도가 나는 환경에 처해지게 되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결국 과도한 마케팅 비를 쓸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마케팅을 많이 해서 물건이 많이 팔리고, 매출이 늘어나면 다시 차입을 하여 재고를 들여오는 방식이 쳇바퀴돌듯 계속되다보니 회사의 부채는 나날이 쌓이게 되고 이것이 외상과 겹쳐 누적 적자는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는 PC를 팔아 남는 이익금으로 제조사의 외상을 값고 부채를 해결해야 하는데, 경쟁사가 늘어나고 수익성이 악화되다보니 결국 제조사의 외상은 갚지 않고 그 돈으로 더 많은 매장의 확충과 마케팅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결국 1차 부도위기를 겪은 세진컴퓨터는 지분의 51%를 대우 통신에게 판매, 부채 중 일부를 해결하고 대기업의 후광을 등에 입어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이미 만성화된 경영악화는 일시적 부채해결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고 결국 1997년 2월, 세진컴퓨터는 대우통신에게 완전매각된다. 

세진컴퓨터와 당시 탱크주의를 앞세운 대우의 만남은 세진컴퓨터를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IMF 이후 대우 그룹의 해체 과정에서 대우통신을 통한 자금조달 및 경영지원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2000년, 법원의 파산 선고를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파산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세진컴퓨터랜드의 자산은 780억 원이었으며 부채는 자산의 6배에 달하는 4,800억 원에 달했다고 하니 이건 뭐...워렌 버핏이나 도널드 트럼프가 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파산에는 내실이 흔들린 이유도 있다.


세진컴퓨터의 파산에는 사실 차입경영으로 인한 부채 증가를 감당할 수 없어서라는 외부적 요인이 명확하게 있지만 내부적 요인도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바로 한상수 사장의 직원 관리법에 대한 이야기다.


한상수 사장은 대한민국 사회의 전형적인 카리스마 형 리더였다고 한다. 게다가 경영자들이 흔히 겪게되는 정주영병(직원을 군대처럼 군기를 심하게 잡고 독단적이며 즉흥적으로 결단을 내려버리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고 하는 것을 정주영병이라고...)이 심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부류의 경영인들의 특징이 뭐든 빠르다는 것이고, 특히 확장에 있어서 매우 빠르다는 것인데 대부분의 경영인들이 그 독단에 발목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상수 사장 역시 이런 기질로 사업을 빠르게 확장시켜나가는 데는 탁월하였으나 독단에 발목잡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본인의 힘이 되어줄 사람을 얻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세진컴퓨터 노동조합이 생겨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상수 사장은 다혈질 성격을 보유하고 있어 직원을 폭행하거나 폭언하는 등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오로지 실력주의, 성과주의를 말하며 오로지 나이,  연차에 관계 없이 능력으로만 평가하겠다고 선언, 신입사원 교육 2주차에 불과한 사람을 대리로 승진시켜주는가 하면 부산지점의 과장은 전화 받는 목소리가 작다고 하여 서울로 소환한 뒤 부랴부랴 올라온 그 사람을 일반 사원으로 강등시키는 인사 정책을 펴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을 군대식으로 휘어잡고 성과 주의, 실력 주의로만 평가하다보니 회사의 서비스 부분에서는 매우 우수했으나 근무환경은 최악으로 치닫고 결국 세진이 위기에 흔들렸을 때 애사심으로 버텨줄 사람보다는 회사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노조를 결정하고 사장 퇴임을 말하는 등 내부적인 문제를 다수 유발했다는 것 또한 세진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런 한상수 사장의 직원 관리에 대해 1995년 당시 시사저널 기사를 보면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겠다"며 여직원에게 폭언, 폭행을 일삼거나 근무 중 사적인 통화를 한 여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회의 시간에 전 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인격적으로 모욕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전 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한 여성은 울면서 뛰쳐나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앞니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지만 한상수 사장은 다음날 그 여직원을 해고조치 했다고 한다.



또 정말 어이없는 에피소드는 대구 단합대회와 관련된 내용인데 정말 어이 없다. 

7월 한달간 전직원 휴무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직원들이 피곤과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에서 8월20일 일요일 근무를 하는 도중 갑작스런 방송이 나왔다. 다음날 대구에서 단합대회가 있으니 전직원은 대구역 앞에 새벽 5시30분까지 집결하라는 방송이었다. 사전 예고가 전혀 없는 갑작스런 일정이었다. 청바지와 운동화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직원들에게 일괄 구입 지시가 내려졌고, 서울 잠실점의 경우 근무가 끝난 밤 10시에 대기해 둔 버스를 타고 전직원이 대구로 이동했다. 전국 각지 5개 점에서 모인 직원들은 잠도 제대로 못잔 상태에서 10km 구보를 했다. 단합대회를 떠나기 직전 전격적인 임금 인상 조처가 발표됐다. 전직원의 임금 제도를 연봉제로 바꾸고 신입 평사원의 연봉을 1천8백만원으로 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당시 대기업 대졸 초입의 연봉이 평균 1천8백만 원, 대기업 대리급의 평균 연봉이 약 2천만 원 정도였다는 걸 감안해보면 신입 평사원의 연봉을 대기업 초입 연봉으로 준다는 제안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그러나 이 발표는 하루 만에 번복되었다. 한 사장은 이 발표를 번복하며 직원들에게 "월급을 올려줘도 고마워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의 타산지석


우선 세진컴퓨터는 아주 짧지만 굵고 강렬하게 사람들 머리에 남은 기업이다. 스베누와 비슷한 흥망성쇠를 보인 기업이지만 훨씬 더 크게 성장했고 훨씬 더 크게 망했다는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무리한 확장, 차입경영, 과도한 마케팅 지출 등 다양하게 비슷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시 한 번 외적 성장보다 내적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일화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사실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사업의 시작이 부채에서 시작했으므로, 이를 해결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직원 교육과 관리를 군대식으로, 무자비하게 했지만 정확한 메뉴얼과 그에 대한 상벌시스템 등이 있었다면? 1차 부도 이후 대우에게 지분의 절반 가량을 넘겼을 때 가맹사업진출 및 구조조정 등을 빠르게 했더라면? 

어짜피 지나간 일이고 결과가 있는 일이므로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 쉽겠지만 사실 정말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스베누도, 세진컴퓨터도 차입 경영이 기반된 무리한 확장으로 무너졌다. 결국 기업이 잘 성장하고 그 리스크를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내적 성장을 통한 상품 차별과, 경쟁력 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